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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택원장 <교양 있게 산다는 것> 무등일보 2013.2.5

 

임선택 보라안과병원 대표원장

 

지난 주 딸 아이 시험이 있어서 서울에 갔다. 

 

서울만 가면 왜 그렇게 날씨가 추워지는지. 그 날도 서울 아침기온이 영하 12도 쯤 되었던 것 같다. 

이미 일기예보를 들은 터라 우리는 요즘 유행하는 발열 내복에 오리털 파카 입고 목도리 동여매고 장갑을 낀 채

 

시험 장소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생 쯤 보이는 아이가 우리와 똑같은 복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옆에 같이 오는 아이 엄마를 보고 나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엄마가 맨손으로 아이의 목도리를 입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붙잡고 같이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중학생이면 다 큰 아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 엄마의 표정은 '이 매서운 추위로부터 내 자식의 입술을 기필코 보호해줘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내 손 하나쯤은 동상에 걸리거나 말거나 말이다.

사실 내가 더 충격을 받은 건 그 아이의 표정이었다.

 

이건 당연하다는, 난 이 정도는 대접받아야한다는 그런 표정이랄까. 

 

몇 년 전 겪었던 일 두 가지를 덧붙이겠다. 

 

외래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럽다.

누군가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을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그러더니 상대방도 같이 욕하고 대기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부는 말리고 일부는 욕을 얻어먹은 상대방 편에 서서 같이 언성을 높였다.

 

 급기야 직원들이 달려가서 말려보는데 쉽게 진정되지 않는 것 같다. 

 

안되겠다 싶어서 나가보니 내 환자 보호자인 젊은 여자가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에게 계속 욕을 퍼붓고 있고, 

그 아주머니도 얼굴이 벌개져서 같이 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서서 말리고 야단도 치고 해서 겨우 진정 시켜 보내고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젊은 여자가 데려온 일곱 살 쯤 된 아이가 대기실에서 너무 시끄럽게 구니 아주머니가 주의를 줬고 그

래도 너무 떠들어서 약간 야단을 쳤는데, 갑자기 아이 엄마가 왜 우리 아들 기죽이냐며 고래고래 악을 쓴 것이다. 

그 때도 충격을 꽤 받았다.

 

그 젊은 여자는 평소 환자 보호자로 들어와 진료실을 나갈 때 항상 감사하다며 아이에게 예쁘게 인사를 시키고 나갔던 사람이다. 

 

또 다른 기억. 

 

저녁식사 약속이 있었던 그 날도 매우 추웠다. 눈도 흩날리고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어서 체감온도가 급강하 하는 그런 날,

 

어찌나 춥던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어가서 건물 엘리베이터를 탔다.

 

막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잠깐만요!” 하며 두 모녀가 뛰어온다. 손은 시리고 문 안으로 찬바람이 들어오지만 문 열림 단추를 누르면서 기다렸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헐레벌떡 엘리베이터를 탄 모녀. 가볍게 "감사합니다"라고 한마디 던질만 한데도, 둘 다 아무 말이 없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많이 고맙지만 너무 춥고 숨도 차고,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을 못하고 있는 거겠지'.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레스토랑 유리문을 열고 딸아이가 먼저 들어가고 엄마도 급하게 들어가면서 그냥 문을 놔 버린다.

 

불쌍한 내 손이 유리문에 부딪힌다. 손도 아팠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교양의 사전적 의미는 ‘문화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을 쌓아 길러지는 마음의 윤택함’ 이라고 한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누군가 그랬다. 교양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라고. 

물론 앞에 등장하는 세 분도 교양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얼마나 아이의 입술이 동상 걸릴까봐 걱정되었으면, 얼마나 아이의 기가 꺾여서 평생을 기죽어 살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으면, 

얼마나 아이의 굶주린 배가 걱정이 되었으면 그랬을까 하며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으며 자라 어른이 됐을 때,

과연 '늘 배려를 몸에 단' 교양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대접(?)을 받고 컸던 사람들 중엔 요즈음 인터넷 동영상에 오르내리고 유튜브까지 올라서 나라 망신시키는 지하철 00녀, 00남 같은 사람들이 있지는 않을까, 감히 단정해본다. 

 

다시 진료실로 돌아와 보자. 나는 나이 드신 환자 어르신에게 안구 모형을 보여주며 망막이란 사진기의 필름과 같은 것으로서

황반변성이 어쩌고, 당뇨망막증이 저쩌고 하면서 열심히 설명한다. 그렇지만 환자 어르신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거린다.

 

이 때 어르신 보호자로 온 젊은 손자는 뒤 의자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느라 휴대폰 속으로 머리가 빨려 들어가기 일보직전이다.

 

그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지금 이 순간 타인일 뿐이다.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바쁘다.

 

경쟁은 갈수록 심해지고 개인주의는 더욱 철저해지는 우리들 일상 속에서 교양 있게 살기란 정말 힘든 것일까? 

 

그리고 오늘 아침, 의사인 나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과연 그가 처한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는 것인지,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