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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택원장<시집 한 권의 여유>무등일보.2013.4.16

임선택 보라안과병원 원장

 

해외 학회 참석과 의료봉사 등으로 일 년에 두 세 번은 외국을 나가게 된다. 

갈 때 마다 꼭 챙기는 것이 비상약과 책이다.

배탈이 나거나 감기, 알레르기 등은 갑자기 생기는 일들이므로 그럴 때 비상약이 없으면 여행이 너무 힘들어진다.

병원 가는 건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약국 가서 원하는 약을 구하기도 얼마나 힘든지, 배탈이 나서 항문 괄약근에 힘을 꽉 주고

약국을 찾아 헤매는, 그런 경험을 한번 해보면 우리나라의 병원이나 약국 접근성이 얼마나 우수한지 깨닫게 된다.

너무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게 사실 문제일 때도 있기는 하지만. 

긴 비행시간 또는 기차로 장시간 이동할 때 책은 꼭 필요하다.

  

요즈음은 스마트폰과 와이파이의 발달로 인터넷 서핑하면서 무료함을 달랠 수도 있지만 

작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면 눈도 피곤하고 머리도 지끈거려 온다.

아무래도 난 스마트폰과 친해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다보니 시간도 때우고 지식(?)도 습득할 겸 책은 항상 몇 권 챙겨간다.

 출장이나 여행 준비 할 때, 옷가지랑 기타 여행 시 필요한 물품들은 한두 시간이면 뚝딱 챙기지만 책을 고를 때는 시간이 많이 든다.

 평소에는 관심 없던 책들이 여행 가려고 고르다보면 이상하게 책 욕심이 더 생긴다. 

소설책 한두 권, 수필집 한 권, 이럴 때 공부 좀 해야지 각오하고 망막 관련 저널 한 권, 교양서적 한 권,

시집도 챙겨볼까라는 생각에 한 권까지 챙기다보면 1주일 여정에 책이 대여섯 권 쯤 되어버린다.

 

 

 

럼 하루에 한 권은 읽어야 하는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다. 다시 빼기 시작한다.

그래봐야 한두 권. 결국 서너 권은 가져가게 되고 여행에서 돌아와 보면 아예 손도 안 댄 책이 절반을 넘는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노하우가 좀 생겼다. 일단 안과 관련 서적은 뺀다.

학회 참석 때에는 그렇지 않아도 안과 공부가 지겨울 정도인데 안과관련 저널은 볼 시간도 없고 눈도 가질 않는다.

 휴가 때에도 비슷하다. 쉬러 와서 망막 저널이 눈에 띄면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교양서적은 좀 나은 편이다. 하지만 이래야 성공한다, 저렇게 해야 삶이 행복해진다라는 식의 교양서적들은 원래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여행가서 읽기에는 적당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 어떤 책들이 이럴 때 좋을까?

 

이런 경우 먼저 추리 소설이 좋다. 재미도 있고 부담없이 편하게 읽을 수도 있고. 고전적인 아가사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의 소설들은 다시 읽어봐도 새롭고 재미있다.

일반 소설도 마찬가지. 하지만 너무 무거운 주제나 한 문장 한 문장을 꾹꾹 눌러 읽어야 하는 책들은 피하는 게 좋을 듯.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드는 건 역시 시집이다. 

사실 처음엔 얇은 부피가 장점이라서 한두 권 넣어가지고 갔었는데 읽어 볼수록 새록새록 재미있다.

여행과 시는 참 잘 맞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시의 짧은 분량, 시간의 여유로움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시의 잔상, 되새김 질.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교내 백일장이 열렸는데 그때 갑자기 뭔가 내 마음 속에 꿈틀거림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시를 쓰고 싶었다. 제목은 ‘새’ 였는데 사춘기의 방황, 고뇌, 뭐 이런 것들을 이겨내고 승화시켜보겠다는 약간은 상투적인,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일등이 장원이고 2등이 차상, 3등이 차하였는데 2·3학년 선배들을 물리치고 덜컥 차상이 되어버렸다.

‘이거 앞으로 시인이 돼야하나?’ 건방진 생각으로 당선작이 실린 교지를 읽어보다가 장원이 된 시를 읽어보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1학년이었는데, 숨이 멎을 뻔 했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달라도 한참 다른 글이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탄식하는 살리에르가 된 느낌. 그 후로 시를 더 열심히 읽게 됐다.

 

 작년 가을에 학회 참석차 런던에 갔었다. 지하철이 서울 못지않게 붐빈다. 객실은 광주 지하철 크기 정도로 아담하다.

요즘 우리나라 지하철의 풍경은 스마트폰이 점령한 듯하다. 그 중 대부분이 게임, TV 시청, 카카오톡 등인 것 같다. 

런던은 아직 스마트폰이 대세가 아니어서 인지, 아니면 책을 더 좋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이나 신문 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그게 참 부러웠다.

  

게임이나 TV 시청 대신 시를 읽으면 어떨까? 우리의 삶이 조금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직접 실행에 옮기면 반드시 더 행복해지리라 확신한다.

내일 출근 길에 시집 하나 챙겨보심이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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