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병원에서의 일이다.
병동에서 입원환자를 보고 있는데 진료를 도와주는 간호사의 귓불에 반짝이는 귀걸이가 아닌 알약이 붙어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게 뭐야?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알약이 귀에 붙어버렸나?’ 하고 자세히 보니 그건 알약모양의 귀걸이였다.
하지만 모양은 영락없는 알약이었다. 주황색과 밝은 크림색이 반반씩 반짝이는 캡슐형 알약.
알약 모양의 귀걸이를 보자마자 영국 출신의 현대 미술 작가인 데미안 허스트가 생각났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현대미술, 그것도 설치미술작가가 그냥 생각 날 정도라면 그는 꽤나 유명인사임엔 틀림없다.
신인시절인 1988년경 영국의 한 유명한 큐레이터의 눈에 띄어 전시회를 개최한 이래로 지금까지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데미안 허스트. 엄청 큰 상어를 통째로 방부처리 해서 작품이라고 내놓는가 하면 양을 방부처리 한 후 절반으로 쪼갠 작품,
해골에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를 붙인 작품, 소머리에 파리가 들끓게 한 후 날아다니다가 전기에 감전되어 죽게 한 작품 등.
나 같은 아마추어가 보기에는 예술이라기보다는 혐오감이 더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의사인 나의 눈에 띈 작품이 하나 있었다. 내가 매일 처방하는 알약들을 진열해 놓은 약장 시리즈.
그때 알았다. ‘아! 알약도 미술작품이 될 수 있구나’
잘은 모르지만 요즈음의 미술계를 보면 작가들이 참 많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새로운 시도, 새로운 소재들을 끊임없이 찾고 생각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추상 작품이나 설치미술은 어렵다. 아니 어렵고 쉽고를 떠나서 작품을 봤을 때 내마음속에서 뭔가 일렁임이 생기질 않는다.
앞서 말했듯 미술에 관해선 난 아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관심은 좀 있다.
그래서인지 광주에서 처음으로 비엔날레가 열렸을 때부터 가능하면 가보려 하고 시간이 나면 시내 갤러리나 시립미술관, 박물관 등도 가본다.
첫 비엔날레 때 본 한 작품을 잊을 수 없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꽤나 큰 상(?)을 받았던 것 같다.
빈 병들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한 가운데 별 볼일 없게 생긴 나룻배 비슷한 것이 놓여있었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 관람객의 표정들이 ‘이게 뭐야? 어쩌라고?’ 하는 표정들... 그때 꽤 강렬한 의문이 들었던 것 같다.
도대체 미술이 뭐지? 예술은? 아름답다는 건 또 뭐고. 그 정도의 느낌과 회의가 들 정도면 그 ‘나룻배’는 나름 훌륭한 역할을 해낸 배였을까?
아무튼 그 이후로 설치미술이나 추상작품 등에 조금 더 관심이 생긴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관심이 생기면 몰랐던 부분들이 조금씩이나마 더 알게 되고 더 흥미로워진다.
투수가 던지는 투구의 종류들. 속구,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 싱커, 포크볼 등,
그런걸 알고 보면 득점은 없어도 투수전 양상으로 전개되는 프로야구 시합도 흥미진진하듯이.
작년 비엔날레 때 무각사의 템플스테이 하는 공간, 나무 마루에 엄청 큰 대들보가 떠받들고 있는 꽤 큰 방에 설치미술 작품이 하나 있었다.
한줌 한줌의 쌀들이 바닥을 메우고 한 가운데 헤이즐 꽃가루 네 줌이 모여 있었다.
그 작가는 그 꽃가루를 몇 달 동안 직접 채취했다고 한다.
마루 가장자리에 앉거나 기대 누워서 찬찬히 보고 있으니 정신도 좀 맑아지고 차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방을 나오는데 그냥 기분이 좋았다. 상쾌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미술 작품들을 더 느끼고 더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오백 원.
집 앞 편의점에서 파는 ‘아이스께끼’ 값보다 싼 돈, 그 돈이 광주 시립 미술관 성인 입장료 이다.
오백 원을 내고 들어가면 1층부터 3층까지 서너 개의 주제로 전시가 열린다. 난 한 달에 한번 정도 주로 쉬는 수요일 오전에 찾아 간다.
평일이라 그런지 항상 고즈넉하다. 어쩔 땐 한 전시실에 나 혼자만 있을 때도 있다.
미술 관람하기에는 최고의 분위기이지만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 얼마나 좋은가! 복잡한 시내, 터미널 근처 극장가, 식당가로만 데이트 하러, 친구 만나러 갈 게 아니다.
미술관에서의 만남. 멋지지 않은가? 예쁜 까페도 있고 나무들이 우거진 시원한 산책길도 있다.
지금 가면 중국 현대작가 장위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 물로만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다.
손가락에 물을 묻혀서 종이에 찍어낸 그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그 동그란 수천 개의 점 하나하나가 마음을 움직인다.
미술관, 박물관을 1년에 열두 번 만 가면 지금보다 훨씬 더 문화적 소양과 감성을 배우고 느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단 돈 육천 원에. 상상해 보자.
귀걸이를 디자인하는 사람이 새로운 아이디어에 목말라 하던 차에 우연히 데미안 허스트의 약장시리즈를 보게 되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먹기만 했던 알약들이 예쁘고 귀여운 모습으로 약장을 반듯하게 가득 메운걸 보고는 아이디어가 불쑥 떠올랐다.
‘아하! 귀엽고 깜직한 알약 모양의 귀걸이를 만들어 볼까?’